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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홍의 소설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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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동굴

                    무너진 동굴
        
  "오빠, 자살하고 싶어."
  "……."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닌 밤중에 봉창 뜯는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나의 동공을 파고들었다. 그렇게도 할 말이 없느냐는 듯이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좋았다. 일단은 나에게 똑바른 시선을 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였다. 자살이란 단어를 내뱉은 것은 그의 침묵을 소멸시키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극약처방은 저승에 가 있는 어미한테 배운 수법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우리 가정은 아비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배를 타는 선원이었던 아비는 육지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술독에 빠졌고, 도박에 빠졌고, 여자에 빠졌다. 아비는 주머니의 돈이 다 털려야만 집으로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였다. 집으로 돌아 온 아비는 어미를 괴롭히다가 말없이 바다로 떠나버리곤 하였다.
  그저 대문의 문패만이 아비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이었다. 집안의 생계는 어미의 몫으로 남았기 때문에 어미는 언제나 남의 집의 허드렛일에 매달렸다. 삶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어미는 쥐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였었다. 물론 극약처방의 한 방편이었기에 다행히도 위세척 몇 번으로 어미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아비의 방탕한 생활을 잠시나마 멈추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몇 달 못 가서 아비의 방탕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쨌든 그러한 사건들 하나하나가 성장하는 내 가슴에 못을 박아 놓았던 것은 틀림없다.
  내가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미끼 던지듯이 그에게 툭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노망기가 들어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옆집 김노인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농담이 진담으로 변할 수도 있는 법, 당장 그의 앞에서 죽어 보일 수도 있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칫, 누구 때문에 이런 귀신이나 나올 집에서 5년씩이나 버티며 살아왔는데…….'라는 생각이 불끈 솟구쳐 오르자 속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어쩌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억제하고 있던 눈물은 터진 봇물이 되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내가 그와 인연을 맺은 것은 도박장에서 일어난 칼부림으로 인하여 아비가 황천객이 된 직후의 일이었다. 당시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아비는 수혈을 받아야 할 긴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희귀한 혈액형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수혈을 받지 못하여 죽음을 빨리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은 아비에게 피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식인 나뿐이라고 말하였다. 서둘러 내 피를 뽑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으나, 의사들은 이내 머리를 설래 설래 흔들며 포기하고 말았다. 내 피로는 아비를 살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아비의 심장이 멎어버렸고, 어미와 나는 시련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아비의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도박 빚뿐이었다. 보금자리 집 한 채가 빚잔치로 사라진 후, 오갈 곳 없는 모녀에게 강씨는 자기 집의 바깥채를 내어 주었다. 어미는 무척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한 배려가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비의 방탕으로 우리 모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강씨는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어미가 아비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몸져누워버리면 집의 쌀독은 텅 빌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강씨는 쌀독에 쌀을 채워주고 떠났다. 그 당시에 어미는 강씨를 오빠라고 불렀다. 나 또한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강씨의 도움을 받더라도 어미는 아비에게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나는 아비의 무능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강씨의 호의를 말하고 말았다.
  "아버지, 삼촌이 와서 쌀도 사주고, 사탕도 사줬어요."
  또 한번 어미를 괴롭히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내 말을 듣는 순간 아비는 악마의 모습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요놈의 가시나가 삼촌은 무슨 얼어먹을 삼촌이야? 뭐?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난다고? 그 놈이 좋으면 가거라. 가란 말이야."      
  아비는 쌀독을 뒤엎어버렸다. 병석에 누워 있는 어미도 패대기를 쳤다. 나에게는 울음이 메말라 있었다. 나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아비의 광란을 담담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 이후로부터 삼촌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마 아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를 강씨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 모녀는 강씨의 도움을 받게 될 때마다 아비에게 철저히 숨기는 버릇이 생겨났다.    
   강씨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다. 강씨네 울타리에 들어감으로 인하여 상견례를 하게 된 그는 대학교를 휴학하고 방위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앙칼진 꿈이 송골송골 여물던 여고 3년생이었다.
  강씨의 집은 조그만 어선을 한 척 가지고 있었으며, 밀감밭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제법 잘 산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우리 모녀는 강씨네 집에 정착하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강씨네 부자는 우리 모녀에게 각별한 신경을 써 주었다. 강씨는 나를 마치 친딸이나 되는 것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며, 강씨의 아들인 정수 역시 나를 친 여동생이라도 되는 듯이 아껴주었다.
  그러나 병석에 누워있는 강씨의 부인만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남편과 뱃일을 함께 해 오던 강씨 부인은 지병으로 인하여 대부분 누워서 하루를 보내는 편이었다. 내 어미는 그녀의 역할을 대신 해내고 있었다. 어미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억척스럽게 움직였다. 뱃일부터 밀감 밭의 일에 이르기까지 강씨 곁에는 언제나 어미가 있었다. 과부인 어미가 늘 자신의 남편 곁에 있다는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허구한 날 아비와 어미의 피 튀기는 부부싸움으로 인하여 귀여움도 못 받고 지옥처럼 지내던 어두운 터널을 탈출했는데……. 이년저년하며 술을 사오지 않는다고 뺨을 후려치던 아비의 기억이 재생되면 나는 몸서리치며 그 기억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발버둥치곤 하였다.  
   나는 아비를 잃은 슬픔을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쾌활해져 갔다. 강씨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대며 귀여움을 독차지하였고, 군복의 사나이 정수를 오빠, 오빠하며 졸졸 따라다녔다.
  정수가 군복을 벗고 대학생으로 변신할 즈음, 이미 나는 그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야릇한 감정으로 그를 흠모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지 그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 안달을 떨어댔다. 그래서 나는 그가 다니는 대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목표까지 설정하고 있었다.
  "미친년 똥싸고 있네. 주제파악을 해야지. 졸업하거든 취직해서 돈이나 쳐 벌어. 이 어미등골을 언제까지 뽑을 작정이냐?"
  아니나 다를까 어미는 펄쩍 뛰고 있었다. 가난뱅이 주제에 대학물을 먹겠다는 내 생각은 황당한 것이었다. 학비는 어떻게든 내 손으로 벌어보겠다는 심사였다. 그러한 나의 부푼 꿈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그는 가끔 나의 부족한 영어와 수학을 지도해 주곤 하였다.
  까마귀처럼 검은 옷을 유독 즐겨 입던 그의 살결은 하얗기만 하였다. 내 가슴속까지 울리는 굵은 목소리, 풍덩 빠져버릴 것 같은 맑은 눈동자는 내 넋을 빼앗기에 충분하였다. 전봇대처럼 커다란 키는 내가 늘 품어오던 이상의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밤마다 그에게 안기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꾼 다음날은 내 심장에서 거대한 북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지곤 하였다. 가끔 그의 눈빛이 나의 불룩한 가슴을 스칠 때마다 내 뺨은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대장간의 쇳덩어리처럼 붉게 빛을 발하였다. 갈색 빛이 적당하게 도색되어 탐스럽게 여문 그의 입술을 꼭 깨물면 달콤한 꿀물이 내 입에 가득 고일 것 같은 환상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자극하였다.
  "정수오빠, 사랑하는 사람 있어?"
  "없어."
  "칫, 그러면 키스도 못해봤겠네."
  "쪼그만 게 발랑 까져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공부나 해 임마."
  그는 꿀밤 한 대를 나에게 먹이곤 하였다. 내 머리를 스치는 그의 주먹 그 자체까지 나는 사랑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속상하였던 것은 그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말투였다.  
  "내 동생이야."
   마치 나를 친동생이나 되는 듯이 소개를 하는 그가 얄미울 뿐이었다. 어쩌면 친 남매지간으로 오해를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차라리 '내 사랑하는 여자야'라든가 '내 애인이야'라는 표현을 써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그런 문제로 투정을 부리면,
  "교복을 입은 애송이를 어떻게 애인이라고 소개하냐? 푸하하하하……."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눈을 흘기며 어서 빨리 교복을 벗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세월은 어김없이 내 교복을 벗기고 있었다. 가난한 나는 대학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유독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마을사람들은 색안경을 쓰고 우리 둘 사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친 오누이처럼 어쩌면 저렇게도 다정할까."
  이렇듯이 마을사람들은 겉치레 말을 던지고 있었지만, 마을빨래터에서는 엉뚱한 소문들을 퍼뜨리고 있었다.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래요. 소희가 졸업하였으니까 곧 결혼시킬 것 같더라고요. 벌써 밤마다 동침을 한다고 한다나요?"
  이런 해괴망측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녔다. 그러한 소문을 접한 어미는 까무러치듯 놀라며 나를 다그쳤다.
  "아이고, 이년아 정수와의 사이가 그렇다는 것 사실이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정수하고는 안 된다. 알았냐?"
  어미는 완고하게 다짐을 하고 있었다. 어미의 화난 얼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곁에 있는 엄마가 더 잘 아는 사실 아닌감? 우린 아무런 일도 없어……."
  "하긴 그렇다만, 더러운 연놈들이 남의 자식 신세 망칠 일 있어? 이 년아, 제발 정수하고 붙어 다니지 마라. 그러니까 오해를 받지."
   "치이, 한 울타리에서 살며 어떻게?"
  어미의 완강한 반대를 의아스럽게 여기며 그 순간을 넘기고 있었지만, 나는 되돌아서서 혀를 날름 내밀며 씨익하고 미소 지었다. 정수는 내 것이라고 온 마을에 공표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다지 기분 나쁜 소문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정수는 그러한 소문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애매한 반응 그 자체가 불만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방위병 생활을 함께 했던 그의 친구가 나를 향해 집요하게 접근해 왔던 적이 있었다. 나는 보아란듯이 그 친구의 호의를 받아주기 시작하였다. 함께 데이트도 하고 전화도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정수의 반응은 금방 나타났다. 그는 내 지갑 속에 있던 친구의 명함까지 갈기갈기 찢어 없애며 부득부득 화를 내었다.
  "그 자식 더 이상 만나지도 마."
  그의 흥분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만세삼창을 부르고 있었다.
  "흥!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를 동생이라고 소개시킨 오빠 잘못은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면 나중에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약속만 해! 그럼 안 만날 테니까."
  나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는 얼이 빠져 한동안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나의 볼에 머물렀다.  
  "이제 되었니?"
  우리 마을 부두 쪽 해안에는 맑은 용천수가 솟아올랐다. 썰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흘러나가면 땅 속으로부터 퐁퐁 솟아오른 지하수가 냇물을 이루었다. 마을에서는 이 용천수를 이용하여 식수로 사용하였고, 공동 목욕탕과 공동 빨래터로도 사용하였다. 여름에는 차가운 물이 솟구치고, 겨울에는 따스한 물이 솟구치는 해안은 사시사철 마을 아낙네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의 모든 사건과 소문들은 빨래터로부터 뻗어나갔다.
  빨래터에서는 또 다시 우리가 사는 울타리가 심심풀이 오징어나 땅콩이 되어 아낙들의 입에서 씹히고 있었다.
  강씨와 어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하였다. 이미 정수와 나 사이의 소문이 퍼져 있는데다가 강씨와 어미의 소문이 가세함으로써, 마을사람들은 우리 울타리의 모녀와 부자가 벌이는 기묘한 사랑이야기에 귀가 곤두 서 있었다. TV연속극보다도 더 인기 있는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던 셈이었다.
  당사자인 강씨와 어미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문이라며 태연하게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문을 접한 나는 밤을 지새우며 고민에 빠지곤 하였다. 정수오빠와 나의 사랑은 푸른 귤이 노랗게 익어가듯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면 남의 눈을 피해 해안을 걷거나, 귤밭 사이를 걸으며 그와 나는 밀착되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씨의 아들인데, 어미가 강씨를 좋아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는 이기적인 계산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성격이 급한 나는 어미에게 따지듯이 말문을 열었다.
  "엄마, 소문대로 아저씨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아저씨는 엄마한테 사돈이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어미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눈에 독기를 품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하나밖에 없는 딸년이라곤 하나도 도움이 안돼. 이 철부지 원수야……. 제발 이 어미의 가슴에 못 박는 소릴랑 하지도 말아라."
  금방 나를 때릴 듯 주먹을 휘두르던 어미는 이내 커다란 한숨을 던지며 주먹을 거두고 있었다.  
  "엄마, 하나밖에 없는 딸의 앞길을 막지는 않을 거지? 이젠 정수오빠 없인 못 산단 말이야……."
  "아이고, 못난 것아……. "
  어미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미의 젖무덤 사이에 내 얼굴이 파묻혔다. 어미의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어미가 정말로 강씨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어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어미를 패대기치던 아비의 말이 떠올랐다. '애인'이라는 말이……. 강씨와 어미가 애인사이였다는 아비의 말이 기억되자 어미의 떨리는 가슴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다음날, 나는 정수에게서 거리를 두기로 작정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애를 태우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오빠, 우리 결혼하자고 한 말…….  서로 취소하자."
   나의 한마디에 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이유가 뭐야?"  
   "우리 엄마 소원 좀 들어주려고 그런다 왜? 오빠는 사윗감이 아니래. "
   "너희 어머니나 우리 아버지……. 왜 그렇게 우리 사이를 반대하지? 차라리 우리 둘이서 멀리 떠나버릴까?"
  "웃기지마. 우리 엄마는 나만을 위해서 이제까지 살아오고 있는 분이야. 더 이상 엄마를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를 향해 입을 열고 있는 나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차마 내 입에서 그러한 말들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었다. 얼이 빠진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오빠 우리가 잠자코 있으면 언젠가 허락해 주실 지도 모르잖아……."
  "어쨌든 내가 허락을 받아낼테니 두고 봐라."  
  그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나에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날 밤에 우리들의 울타리에는 한바탕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강씨 부인에게 병문안을 왔던 아낙네들이 항간에 떠돌던 소문을 귀띔해 준 것이 발단이 되어버렸다. 병석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온 강씨 부인은 어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늘어졌다.
  "서방 잡아먹은 년을 불쌍해서 거두어 주었더니 이제는 남의 서방을 꼬여? 내 이년들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거라! 배은망덕한 것들……."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강씨 부인이 자기 분을 삭이지 못해 혼절함으로써 그 혼란은 금방 일단락되었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환자의 손에 질질 끌리던 어미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내 머리에 남아 있었다.
  "엄마, 내일이라도 당장 우리 여길 떠나요."
  "그러자꾸나."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어미의 눈빛에는 물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다음날부터 어미는 우리 모녀가 거처할 수 있는 방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미와 나의 계획은 한낱 꿈에 불과하였다. 운명의 실타래는 우리 모녀를 강씨네 울타리 속에 꼭꼭 가두고 있었다. 어미에게 분풀이에 쏟은 충격 때문에 강씨 부인은 완전히 자리에 눕고 말았다. 원인 제공자라는 속죄의식 때문에 우리 모녀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녀는 강씨 부인의 미음을 번갈아 끓였고, 그녀의 병시중도 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울타리는 잠시 서로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었다. 어쩌면 평온한 것 같았지만, 시한폭탄의 계기가 제로를 향해 달려가는 긴장이 팽팽하게 드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태풍전야의 고요였다.
  실제로 강풍을 동반한 태풍의 소식이 전해지던 날, 강씨 부자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 동안 강씨와 정수는 나와의 교제문제로 인하여 티격태격 잦은 충돌을 보여 왔었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바람이 점차 거세지는 가운데, 강씨 부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타리를 넘나들고 있었다. 평소보다는 격하다는 느낌이 들어 어미와 나는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정수도 방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강씨가 뒤쫓아 나왔다. 네 명은 순간 어색한 눈빛들을 주고받았다. 나를 째려보던 정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강씨는 어미 앞으로 다가서서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다 말해버렸지……."
  강씨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미는 짧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인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미에게 가서 강씨가 한 말의 의미를 다그칠까 생각하다가 정수를 찾아 물어보는 쪽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발걸음은 주저하지 않고 부두 건너편 쪽에 있는 자살바위를 향하고 있었다. 정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을 즐겨 찾는 버릇이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놓여져 금방 바다로 굴러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항상 굳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는 몇 사람의 자살자 때문에 자살바위라는 명칭을 얻고 있었다. 자살바위 곁에는 위험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지만, 바위에서 바라보이는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끝없는 바다의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고, 머리를 왼쪽으로 살짝 틀면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마을과 바다 사이에는 조그만 마을 부두가 앙증맞게 전개되는 곳이었다. 게다가 뒤를 돌아보면 웅장한 한라산의 자태를 바라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나의 생각대로 정수는 그곳에 있었다. 거센 바람에 옷깃을 휘날리며 우뚝 서 있었다. 내가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분명 내가 곁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반응이 없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갑자기 몸을 돌린 그는 나를 우악스럽게 껴안았다. 내 몸은 그의 품안으로 빨려들었다.  
  "차라리 여기에서 콱 뛰어내려 죽고 싶구나. 이대로 너를 안고……."
  그의 상체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고 꺼억꺼억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나를 뿌리치며 휑하니 마을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도대체 강씨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듯이 괴로워하는 것일까……. 나는 자살바위를 뒤로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온통 묵직한 침묵으로 휩싸여 있었다.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은 대지를 뒤흔들었다. 정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분주하게 밭과 집을 드나드는 어미를 보며 나의 궁금증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밤이 되자 강씨와 어미는 또 다시 배를 돌보아야 한다며 부두로 나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모습이 문득 정다워 보였다. 강씨 부인이 죽고 난 후에 저렇듯 부부로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강씨는 어미와의 관계를 정수에게 밝힌 것은 아닐까……. 그러한 추측이 허공을 스치는 등대불빛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강씨와 어미의 모습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태풍이 물러간 고요한 바다에서 깨어진 배의 파편과 함께 두 사람은 시체로 떠올랐다. 청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강씨와 어미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정수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에는 연일 술독에 빠져 살아갔다. 그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거니와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어미를 잃고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린 나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강씨 부인의 간병은 내 차지가 되어 있었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정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는 이제 내 어머니나 다를 바 없다는 성숙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강씨 부인은 등창이 생겨 등이 짓무르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생명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정수는 집안의 모든 일들을 팽개쳐 놓은 채 방황을 계속 하였다. 나는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밀감밭을 팔아치웠다. 밤늦게 만취되어 들어 온 그는 나의 방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는 나를 껴안았다. 그 동안 지쳐있던 나의 심신이 그의 품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엉큼스럽게 간직해 오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폭발하면서 나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몸뚱이를 맡겨버렸다.
  그와 나 사이를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머리 속에서는 그가 내 옷을 송두리째 벗겨버릴 것이란 상상을 하며,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나를 껴안은 채로 아무런 말도 없이 또 다시 흐느끼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나는 사기를 당한 듯한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코를 고는 그의 숨결에 나의 피부를 스쳐보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잠든 그의 모습을 자세하게 훑어보며 그의 입술에 입맞춤도 해 보고, T셔츠 단추 사이로 보이는 몇 가닥의 가슴 털도 세어보면서 행복해 하였다. 그의 모습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새벽녘에야 그의 가슴에 얼굴을 얹고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다음날, 내 곁에 있어야할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툼한 돈 봉투와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하였다. 제주를 떠나 육지로 간다는 내용과 잠시 자신을 찾지 말고, 남겨 둔 돈으로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앞날이 암담하기만 하였다. 그가 마지막 줄에 남긴 글이 내 시야에서 선명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너를 사랑하는 오빠로부터'
  기약 없이 떠나버린 그가 너무 야속하기만 하였다. 생명이 오늘내일 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나에게 부탁하고 사라진 그가 한없이 미웠다.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그 내용만으로 나의 분노는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바람을 쏘이고 하루빨리 나타나길 바랄 뿐이었다.
  그가 떠난 지 한 달 만에 그의 어머니는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신문에까지 광고를 냈으나 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다. 결국 상주가 없는 장례식을 쓸쓸하게 치렀다. 죽음의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우리 울타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떠난 이후, 내 가슴 깊은 곳에 은밀한 동굴 하나가 생성되었다. 가끔 홀로의 시간에 백촉짜리 백열전등을 켜고 동굴 안을 들여다보면, 그와 함께 지내던 추억의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만이 가진 기쁨과 슬픔,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채로…….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침범 당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동굴이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날 동굴의 상자들은 열리리라. 나는 덩그런 집에 홀로 남아 그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을에서는 우리 울타리를 가리키며 흉가라고 손가락질하였다. 그들이 제 아무리 입방아를 찧더라도 나는 태연하게 혼자의 고독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무리 내가 집안을 단장한다고 한들 남자가 없는 집은 누가 보아도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붕 위에 돋아난 잡풀들과 담장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넝쿨들이 더욱 더 흉가의 이미지를 드높여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내 사랑 그가 언젠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리라는 환상만이 내 가슴에 꽉 차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그는 내가 늘 꿈속에 담아왔던 백마를 탄 기사이기는커녕 패잔병의 몰골이었다. 윤기가 흐르고 팽팽하던 피부는 자취를 감추고, 뼈에 가죽만 입힌 모습이었다. 그를 접하는 순간,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출현으로 인하여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환희의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나타난 순간, 내 손은 나의 가슴팍을 꽉 쥐고 있었다. 가슴속의 동굴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어쨌든 동굴은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굴은 폐허가 되기 직전이었다. 동굴 속은 먼지가 자욱하고 거미줄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의 출현으로 인하여 어떤 알 수 없는 '숙명(宿命)'이란 단어를 되씹으면서 동굴 속의 먼지를 털고, 거미줄도 치우며 환상의 상자들을 열기 시작하였다. 상자들 속에서는 조금은 퇴색된 듯한 옛 기억들이 어제의 일들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5년이란 세월을 마치 며칠간 출장이라도 갔다 온 것처럼,
  "그 동안 잘 지냈어?"
  라는 간단한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나는 눈시울을 적시며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 숱한 이야기들을 접어두고 말았다. 그 동안의 나의 생활과 그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들이 자욱하게 휘날리는 눈송이들만큼이나 많았지만, 그의 입은 단단하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쇠가 채워져 있던 안채가 주인을 맞았다. 벽지가 퇴색되고 퀴퀴한 곰팡이냄새가 진동하는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5년이라는 세월이 저 사람을 저렇게 변하게 만들었는가. 10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일 정도로 얼굴은 쭈글쭈글한 주름이 생겨 있었다. 그렇게 탄탄하던 피부에는 굵은 핏줄들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가 가진 짐이라곤 비행기 화물표가 붙은 옷가방과 일본어가 쓰인 공항 면세점의 쇼핑백이 전부였다. 그는 쇼핑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일본화장품들이 몇 가지 들어 있었다.
  "오빠 고마워. 뭘 이런 것까지……. 어머, 일본에 있다가 왔구나?"
  수줍게 아양을 떨어대는 나에게 그저 미소를 지었을 뿐, 그는 더 이상의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하여 지금까지 다니던 화물회사에 휴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기 시작하였다. 마치 남편이 돌아온 것처럼 나의 행동은 분주하기만 하였다. 부엌에서 흘러나가는 도마질소리가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차려주는 밥을 그는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밥을 먹은 후에는 많은 양의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분명 그의 몸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가끔 기침이 심해지면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그의 곁을 맴돌아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나는 그가 돌아와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을 하면서 그가 떠나던 마지막 날 밤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한번쯤 또 다시 안아 주리라는 기대를 은근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점차 소멸되고 있었던 그와의 옛 기억들이 풋풋한 과일향기를 내뿜으며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틀을 꼬박 생전의 자기 어머니마냥 방안에만 누워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부터 집안을 온통 뒤집더니 시렁 위에서 서류 상자를 꺼내었다. 그는 서류더미 속에 든 집문서를 들고 바깥나들이를 하였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는 나를 데리고 시내 칠성통으로 나갔다. 그는 마치 벙어리나 되는 양 자신의 의사를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황당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달라지고 있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며 애완견처럼 졸졸 따라 다녔다. 그는 옷가게로 들어서서 나의 철지난 패션의 허물을 벗겨 주었다. 나는 마치 신데렐라의 꿈을 꾸듯이 아무런 거절도 하지 않았다.
  "어머 사모님, 이 옷을 입으니 너무 예쁘시네요. 선생님 그렇지 않으세요?"
  옷가게의 여직원은 그와 나를 당연히 부부라고 여기며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재빨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정쩡한 그의 모습이 뚜렷하게 내 동공을 파고들었다. 순간, 어쩌면 그가 서서히 나에게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자신의 집을 지켜준 대가로 이렇게 돈을 뿌려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그러한 잡념이 머리에 꽉 차 오르자 숨통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그 동안 집을 지켜주느라고 수고했어. 내 생활도 여의치 않아서 집을 팔았는데, 어디 살만한 곳은 있어?'
  라는 추방명령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진정 그가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당초에 우리 모녀가 들어올 때부터 빈 털털이였으니까. 그 동안 집세를 안 내고 공짜로 살아왔던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자위를 하면서도 나는 기어코 그의 방을 열고야 말았다. 그는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출현으로 놀라는 눈빛……. 역시 낯선 그의 모습……. 내 가슴속에 잔존해 왔던 동굴에서 균열 음이 들리는 듯싶었다. 그의 속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끄집어 낸 말이 '오빠, 자살하고 싶어'라는 말이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내세웠다는 그 자체가 궁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그는 입을 열었다.  
  "자살? 웬 자살?"
  "결국 5년 만에 나타나서 나를 피하는 이유가 뭐야? 그리고 왜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는 거야? 도대체 그 이유가 뭐야? 지금 심정으로는 오빠 앞에서 콱 죽어 보이고 싶단 말이야."  
  나는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이글거릴 뿐이었다.
  "죽을 사람은 따로 있어. 너 같은 천사가 죽어선 안돼."
  "천사 좋아하시네. 그래 내가 아줌마의 병시중 들고 장사까지 치러 주었겠다, 이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을 잘도 지켜 주었으니까 천사라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군. 그 천사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이젠 조용히 사라져 줘야지 뭐. 지금은 내가 귀찮은 존재지? 그래 내가 떠나주면 되는 거 아냐?"
  나는 스스로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그의 팔이 나의 목덜미를 감싸왔다.
  "소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그는 느닷없이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던졌다. 나는 등 뒤에 실린 그의 무게에 짓눌린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내 가슴으로 흘러내린 그의 손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목덜미 쪽에서 들리는 그의 쇳소리 섞인 숨결이 그래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소희야. 죽고 싶은 사람은 나야. 나는 아버지와 아주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야."
  나는 심호흡을 하였다. 숨을 죽인 채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소주병을 꿰차고 배로 갔을 때 선실 안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볼 수 있었지. 그 불빛 아래에 뒤엉킨 두 분을 볼 수 있었어. 그땐 이미 내가 이성을 잃고 있었어. 배에서 뛰어내린 나는 부두에 매어진 밧줄을 모두 풀어버렸지. 골탕을 먹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거대한 파도가 부두로 몰려오리라고는……."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나 또한 떨고 있었다. 나의 머리 속에서는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미의 모습과 강씨의 모습들이 슬라이드화면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전개되고 있었다. 내 목덜미에 한 방울의 액체가 떨어졌다. 따스한 감촉을 지닌 그의 눈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워하며 고향을 등졌고, 방탕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에는 일본까지 흘러들었고,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말기 폐암을 앓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멍청하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다음날이었다. 그의 방문을 열었다. 그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바람을 쏘이러 나갔으리라고 생각하며, 그의 방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섰다. 방은 대체적으로 깨끗하였다. 책상 위에는 어제 그가 쓰던 분홍빛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는 팔아버렸다고 생각되었던 집문서도 가지런하게 모아져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하지 않은 편지봉투를 열어보았다. '사랑하는 소희에게'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 너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네가 우리 강씨 피를 받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게 된 순간……. 미치지 못한 것이 한이었지. 내 입으로 도저히 너에게 그러한 말을 하기가……. '
  구구절절한 내용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통곡하고 있었다. 자살바위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던 그의 모습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숨이 넘어가는 아비가 내 피를 받을 수 없었던 수수께끼의 자물쇠가 열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동생아. 너를 보고 떠나니 홀가분하구나. 어차피 내 생명은 한 달을 못 넘긴다. 너에게 더 이상의 고통들을 주기 전에 떠나련다.'
  편지를 움켜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 무더기의 칼날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음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이어서 내 가슴속에 내재되었던 동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와르르르르…….
  자살바위에는 그의 하얀 운동화 두 짝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서귀포문학』 11호(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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