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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홍의 소설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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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동안의 처용이

               일주일동안의 처용이

                                                                                      
  <일>요일. 손수건만 한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은 내 달콤한 잠을 끊임없이 노크하였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찾아 들어 새로운 하루를 열어주는 반가운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늦잠을 보장받은 일요일 아침만은 지겹기만 한 불청객이었다. 나는 눈꺼풀의 빗장을 단단히 걸고서 외면할 뿐이었다. 그래도 햇살은 빚 독촉이라도 하는 채권자마냥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꿀단지와 같은 잠을 부여잡고 자꾸만 이불 속 암흑의 세계로 잠입하였다. 하지만, 나의 거드름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전화벨까지도 합세하여 천둥처럼 울려댔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도저히 더 이상 피할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눈꺼풀의 빗장을 열고 말았다. 허물을 벗는 굼벵이처럼 이불 속으로부터 꼬물꼬물 기어 나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민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몽사몽 몇 마디의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던 나는 무겁디무거운 눈까풀을 번쩍 들어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좀 쉬다 올 거야. 한 일주일 걸릴 것 같아. 보고 싶더라도 참을 수 있지? 돌아올 때 자기가 좋아하는 쥐포 사다 줄께. 사랑해. 쪽쪽쪽쪽쪽……."
  수화기를 잡고 있던 나의 손은 힘없이 펴지고 있었다. 동시에 깨어진 유리파편들의 소음이 내 머리를 강타하였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런 음성도 그녀에게 전하지 않았다. 조금은 빨라진 내 심장의 고동소리만 그녀에게 대답처럼 던지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침묵을 난도질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반응을 강요하였다.
  "어, 그래? 여행을 간다고?"
  "그렇다니깐……."  
  "그. 래 ?  잘. 다. 녀. 와……."
  나는 마치 숨넘어가는 환자처럼 자지러지는 목소리를 던졌다.
  "뭐야. 꼭 뒤 마려운 강아지새끼가 낑낑거리는 것 같아. 내가 여행가는 것 싫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민지가 여행을 간다는 말에 내가 왜 이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일주일씩이나 못 보게 될 아쉬움은 묵직한 쇠망치가 되어 나의 마음을 때렸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소리가 민지의 쪽쪽거리는 키스소리처럼 여운을 남기는 동안, 나는 또 다시 멍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지와 같은 시간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얀 장막이었다.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으면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은 숨 막힘을 느끼며 끝내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잘 다녀오라니깐."
  "아잉 자기야. 자기가 그렇게 볼멘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제발 기분 좋게 날 좀 보내 줘. 응? 갔다 와서 자기한테 백 번 뽀뽀해 줄게. 자기가 정 그렇게 싫어하면 그만 취소할까?"
  급기야 그녀의 코 먹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뒤 마려운 강아지새끼가 되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주어 입을 벌렸다.
  "조심히 다녀와!"
  "어휴, 시원한 목소리……. 고마워. 그럼 다녀와서 봐. 토요일에는 꼭 돌아 올 거야. 안녕."
  마치 승리자의 환호성과 같은 경쾌한 그녀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뚜뚜뚜거리는 단조로운 음만이 내 귓전에 이어졌다. 그녀는 머물 곳의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잘. 다. 녀. 와…….'라는 나의 볼멘 말. 그녀의 표현대로 뒤 마려운 강아지새끼가 낑낑거리는 소리였음에 분명하였다. 상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 하나에서, 말의 높낮이 하나에서, 몸짓 하나에서 서로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던 그녀와 나. 내 목소리 자체가 잘 다녀오라는 흔쾌한 허락이었다기보다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쪽을 택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그녀였다.
  멈추지 않는 샤워기마냥 끈질기게 쏟아지고 있는 수화기 속의 단절음에서 연탄가스 같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후다닥 창문을 열었다. 맑은 공기방울이 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말의 후회가 가슴을 짓눌러왔다. 이왕이면 '조심히 잘 다녀와. 좋은 여행이 되길……'하고 흔쾌하게 대답해 주었더라면, 떠나는 민지의 마음도 홀가분했을 것이 아닌가. 내 곁을 영영 떠난다는 폭탄선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이향기를 풍기는 그녀, 장미꽃을 닮은 그녀, 수선화와 같은 그녀. 민지가 내 품안의 새장을 벗어나면 멀리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가슴속에 잔존하고 있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나의 새장 안에 꼭꼭 가두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월>요일. 민지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내 호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잘 작동되고 있는지 내 스스로 전화를 걸어 체크해 보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멀쩡한 배터리까지 다시 갈아 끼우며 벨소리를 선명하게 키워 놓았다. 벌써 열 번 이상을 민지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메시지를 남기라는 안내목소리만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계속 걸어보았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민지였던지라 그녀의 어머니에게 부산의 친척집 전화번호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마저 끝내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어머니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녀가 일주일씩이나 어머니와 함께 붙어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어쩌면 어머니와 화해의 여행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닥을 잡아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나로서는 일말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민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면 꾀꼬리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조그만 방안을 헤집고 다니며 마냥 쫑알거렸다.
  '쥐포 못 먹고 죽은 귀신이 있다던? 그래 사랑한다며 쪽쪽거리고 떠나면 다야? 부산은 전화도 없는 깡촌이더냐? 핸드폰은 자갈치 시장의 아나고 볶음에 넣어 볶아 먹어버렸나? 바닷바람을 쏘이면 전화번호 같은 것은 다 잊어버릴 정도로 해골이 텅 비어버리나 보지? 부산에 가면 손가락이 갈매기의 날개로 변해 버리나 보지? 설마 태종대 등대 위에서 오륙도 바다에 매료되어 펄쩍 뛰어내렸을 리는 만무하고…… 그래 잘 먹고 잘 살다가 나타나고 싶으면 나타나고, 나타나고 싶지 않으면 영영 나타나지 말고……'

  민지를 처음 만난 것은 신촌의 어느 락카페였다. 축제 뒤풀이를 한 후, 친한 벗들과 함께 소주 한잔을 나누기 위해 나섰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현란한 조명 아래에서 나는 다섯 명의 벗들과 떠들썩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건너편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왁자지껄하게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자꾸만 내 눈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내 시선은 계속 건너편의 여자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들이 마치 안주나 되는 듯이 한 모금 마시고 힐끗, 또 한 모금 마시고 힐끗…… 내 손은 평소에 즐기던 새우깡 안주통에 접근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녀들 속에서 한 여자아이를 집요하게 탐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하게 웃는 모습 속에 드러난 도톰한 입술과 하얀 이빨, 긴 머리카락과 짙은 속눈썹, 커다란 눈, 스커트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긴 다리…… 바로 민지였다.  
  전봇대에 치마만 걸쳐놓아도 여자로 보였던 군대생활에 찌들어 살다가 갓 복학한 수컷의 본능이 발산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침을 꼴깍거리며 지속적으로 민지의 모습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 속에서 불룩 솟아오른 민지의 가슴이 움찔거릴 때마다 나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내가 뇌 속에 설정해 두었던 마돈나와 동일한 타입이었다.
  ‘저 여자를 낚고 싶다! 저 여자를 품에 안고 싶다!’ 나의 뇌 속에서는 분명히 늑대와 같은 엉큼한 프로그램이 계속 가동되고 있었다. 친구 녀석들은 내 시선의 향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녀석들은 구정물통에나 버려버릴 만한 정치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정치의 화제는 곧 꼬리에서 꼬리를  물며 다양한 이야기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엉뚱하게도 오렌지 족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양쪽 귀를 쫑긋 세워 친구 녀석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가끔 미소를 띄워보기도 하고, 장단도 맞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 눈동자는 카메라 렌즈처럼 윤기가 잘잘 흐르는 민지의 긴 머릿결을 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빈 년들 많았어. 저쪽 동교동쪽 대로변에서 서성거리던 여자들은 날 낚아 줘용! 하는 여자들이었다나? 그런 여자들을 오렌지로 낚을 수 있었대. 오렌지족들은 거의가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빤츠나 뱀더뷸같은……우리 같은 가랑이가 찢어지는 가난뱅이들이 어디 흉내나 낼 수 있는 일이야? 제길 헐…… 술이나 한잔하자 썅."
  친구 녀석들은 야타족이 어떻고, 나타족이 어떻고, 너타족이 어떻다고 궁상을 떨고 있었지만, 술기운이 오르면 오를수록 내 관심은 점차 민지의 모습에 집착하고 있었다. 친구녀석들의 잡담같은 것은 미미한 잡음과도 같았다.
  화장실로 향하는 민지의 움직임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되며 내 동공에 포착되었다. 그 순간 테이블 위의 꽃병에 앙증맞게 꽂아져 있던 한 송이의 장미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카페는 언제나 테이블에 싱싱한 장미를 꼽아 놓고 있었다. 나는 민첩하게 장미를 뽑아 들었다. 물방울 한 두 점이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은은한 장미향이 코끝을 휘감았다. 돈키호테적인 무모한 프러포즈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친구 녀석들의 말대로 오렌지 대신에 장미꽃으로라도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어항 속의 공기방울처럼 뽀골뽀골 피어올랐다. 장미를 든 나는 주저하지 않고 화장실 쪽으로 향하였다.  
  잠시 후, 화장실 쪽에서 민지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멈칫거리며 민지를 향해 다가섰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공교롭게도 구두굽이 계단의 모서리에 걸리면서 나는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손안에 들려 있던 장미는 그녀의 발밑을 향해 날아갔다. 내 몸을 일으키는 것과 민지가 허리를 굽혀 장미를 집어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몸을 털고 있는 나에게 민지는 장미를 내밀고 있었다. 스타일을 구겼다는 생각이 들자 술기운이 확 달아올랐다. 작전의 변경을 위한 프로그램이 머리에서 쌩쌩 돌면서 묘안이 반짝하고 떠올랐다.  
  "이 장미를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무슨 말이세요? 그 쪽이 넘어지면서 놓친 것이잖아요."
  "중요한 것은 그쪽이 지금 저에게 장미를 내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그렇지요?"
  "그렇긴 그러네요. 빨리 받으세요."
  "프러포즈 감사합니다. 받아들이지요."
  "어머나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만 두세요."
  민지는 입을 삐쭉거리며 장미를 쥔 채로 자기 패거리 쪽으로 향하였다. 나는 재빨리 민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봐요. 내 장미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내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것이죠?"
  "어머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나한테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결국 나는 술기운을 빌어 뻔뻔스럽게 그녀를 낚을 수 있었다. 그러한 나 때문에 그날은 친구들이 주머니를 몽땅 털리는 날이 되어버렸다.

<화>요일. 민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녀의 핸드폰은 불통. 그녀의 집 역시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밤에 민지의 사진들이 들어 있는 앨범을 보며 그녀와의 시간들을 음미하느라고 잠을 설치고 말았다. 쏟아지는 졸음을 부둥켜 않고 학교로 향하였다. 버스 운전석에 붙여진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이 선명하게 내 시야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년인지 소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민지는 오늘도 무사한지…… 엉터리 공사로 인하여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붕괴되고, 가스관이 폭발하여 졸지에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 가는 지뢰밭 같은 세상에서 그녀는 안전한지…… 돈에 눈이 멀어 여자들을 납치하여 팔아넘기는 악당들도 활보하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잘 있는지…….
  캠퍼스로 향하면서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뉴스 속의 사고소식들은 나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부산 쪽에서 사고소식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귀를 계속 쫑긋 세우고 있었다.  
  강의실에서도 핸드폰을 주먹 안에 가두어 두고 벨이 울어주기를 애원했다. 덕분에 교수님의 목소리는 내 귓바퀴에서 맴돌다 떠나갔다.
  하루 종일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몽롱한 정신은 나의 몸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떨어진 알코올 중독자들이 느끼는 금단현상이란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은 아닐까. 내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매일 한결같이 들어왔던 민지의 목소리에 나는 이미 중독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핸드폰 없는 미개인이 어디 있어?"
  민지의 성화에 의해 구입한 핸드폰은, 민지와 나의 시간과 공간을 이미 4차원의 세계로 변화시켜버린 도구가 되어버렸다.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나 싶어질 정도로 나는 핸드폰의 노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소유가 아닌 구속이라고 해야 할까?
  핸드폰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친구들에게 내 자유를 구속하는 개목걸이를 차기 싫기 때문이라고 떠들어댔었다. 그러나 실상은 핸드폰을 구입할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동네에서 줄곧 성장해 왔던 나였던 만큼, 빈곤과는 매우 친근한 사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그 자체가 내 삶의 가치관을 그렇게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민지를 만난 후로부터, 자본주의의 가치관은 돈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비싼 것을 좋아하고, 안락함을 좋아하는 민지. 나는 그녀가 추구하는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함께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곤 하였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자위하던 소박한 나의 인생관은 물질의 풍요로움 앞에서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다고 끙끙거리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기업의 외동딸로서 한때 부유함을 만끽하였던 민지.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빈곤한 삶을 체험한 민지.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대학까지 포기한 민지.
  "궁색하게 살고 싶지 않아. 돈을 벌 수 있다면, 실컷 벌어보고 싶어."  
  민지의 꿈속에는 풍요롭던 옛 시절로의 회귀욕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특히 스포츠카를 좋아하였다. 자동차 전시회가 열리면 반드시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스포츠카만 골라 타 보기도 하고, 자동차 정보지에서 그럴듯한 스포츠카를 보면 오려내어 스크랩해두곤 하였다.  
  그녀의 핸드폰을 자주 울려대는 희수라는 녀석은 날렵한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부유한 녀석이었다. 그녀는 나와의 데이트를 위해 나타날 때에도 녀석의 차를 타고 나타나곤 하였다. 그녀를 만난 처음 몇 번인가는 그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썼던 만큼, 나는 그녀를 아끼는 친척오빠라도 되는 줄로 알았었다. 그러나 아무런 관계도 아닌 그저 오빠동생 하는 벗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얼마나 경악을 금치 못했던가. 교통편이 안 좋아서 녀석의 차를 타고 오게 된다고 그녀는 태연스럽게 이야기하였다. 아무리 그녀가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소위 남자친구라고 입을 뻥긋거리는 나를 만나는 장소에 희수의 차를 타고 나타난다는 사실은 엉뚱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혹시 나에게서 질투를 유발시키려고? 질투를 유발시키는 방법치고는 너무 치졸하고 잔인한 방법이 아니던가. 가난이라는 못이 잔뜩 꼽아져 상처투성이인 내 가슴속에 민지는 커다란 쇠말뚝을 고통스럽게 박아댔던 것이다.  
  "단지 친구일 뿐이야. 내가 차를 타고 싶다면 오늘처럼 태워주는 그냥 편한 친구야. 그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자기는 여자친구 없어? 친구니까 신세도 질 수 있는 것이고…… 계는 돈이 많을지는 몰라도 자기처럼 똑똑하지도 못해. 질투하는 거야? 앞으로 유능한 법관이 될 법학도가 째째하게스리…… "
  민지가 나만의 여자가 되어주길 바라는 희망은 졸지에 옹졸한 사내의 질투로 치부되고 마는 순간이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민지를 빨간색 스포츠카에 태우고 텅 빈 고속도로를 질주해 보고 싶다는 욕망들은 항상 내 머리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당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길은 1등 복권에 당첨되거나, 어느 날 갑자기 눈먼 돈 뭉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밖에 없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후, 나는 아르바이트에 흠뻑 빠져 있었다. 되도록이면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건설현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땀을 뺐다. 민지와 바닷바람을 쏘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노동이었다. 내가 민지와의 외출을 꿈꾸며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의 벗들과 동해안을 다녀왔다. 새까맣게 타서 돌아 온 그녀는 너무 즐거웠다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녀는 동해바다의 냄새가 흠뻑 젖어 있는 사진들을 내 앞에 나열하였다. 그 사진들 속에 희수라는 친구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내 눈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분명 질투의 불꽃이었다. 비키니 차림의 그녀를 감싸고 찍은 녀석의 모습은 내 배알을 꼬이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래도 민지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친구들한테 물주가 필요했어. 희수는 돈도 많고 여자 애들한테 인기가 많아. 계네 별장을 빌려 써야 할 형편이었고…… 자기야. 희수는 자기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 녀석이거든. 그렇게도 자신이 없어? 내가 자기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라? 정말 숨이 막힌다. 벌써부터 나를 구속하려고 하지 마."
  구속? 사랑하는 여자를 나만이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구속이라고? 그렇다면 무관심해 달라는 주문? 무관심이란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민지가 나에게 던져 온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차라리 '좋아한다'는 말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나 또한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해서 질투를 느낄 필요도 없을 것이고, 구속이라고 느낄만한 간섭을 하지도 않게 될 터이니까.

  <수>요일. 민지로부터 전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거는 것도 포기해버렸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몰랐다. 낙숫물 소리가 공허하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들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저 숱하게 쏟아지는 빗방울들만큼 자기를 사랑해."
  하지만, 나는 그녀의 달콤한 사랑표현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꼭꼭 짓누르고 있었다. 서로 부담이 없는 사이로 남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이란 단어를 다시 쓰게 되면 또 다시 그녀를 내가 만든 새장에 가두고, 나만이 그녀를 음미하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내 새장의 문을 열어 놓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 그녀를 오래 만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런 나의 생각을 비웃으며 멋대가리 없는 남자라고 투덜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희수를 만나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다짐을 해왔다.    
  "자기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사랑해!"
  내 마음이 심드렁해지면 민지의 사랑표현은 더 깊어지곤 하였다. 저돌적으로 내 품을 파고들었다. 여자의 심리, 아니 민지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심리였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다고 해야 할까. 가깝게 다가서면 달아나고, 물러서면 다가오는 그녀.  
   아무튼 매일 내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어딘가 덧이라도 날듯이 전화질을 해대던 민지. 그러던 그녀는 나에게 연락을 뚝 끊어버리고 말았다. 집요하리만큼 시시각각 전화를 해 올 때마다 하루쯤은 그녀가 내 전화번호를 망각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언제였던가.
  난생 처음 핸드폰이라는 것을, 그것도 민지의 강요에 의해 소유하게 되던 날. 민지는 0124040이라는 숫자를 남겨 주었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의 숫자였다. 나는 숫자를 지우지 않고 저장시켜 두었다. 가끔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숫자를 음미하곤 하였다. 언제 확인하여도 정겨운 숫자의 배열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생긴 것을 그저 좋아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방울을 단 고양이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 개목걸이를 찬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지 모를 일이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나의 행동을 구속하는 애물단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민지는 나에게 핸드폰을 갖게 해 놓은 후부터 허구한 날 나의 행동반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감시를 받는다는 사실.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지는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치기가 무섭게 전화를 때려대곤 하였다.
  회사원이었던 민지는 나를 만난 후부터 뻔질나게 대학가를 찾아들었다. 그녀는 내 팔을 끼고 캠퍼스를 거닐길 좋아하였다. 캠퍼스에서 눈을 씻고 또 씻으며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민지만한 미모는 찾기 힘들 것이라고 큰 소리까지 쳤다. 늘씬한 키에 쏙 들어간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고 캠퍼스를 거니는 일은 짜릿한 쾌감이었다. 주변 남자 녀석들의 시선이 그녀와 나에게 쏠릴 때마다 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다정한 포즈를 취하곤 하였다. 암사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수사자가 다른 수사자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었다고나 할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민지는 나보다 한술 더 떠서 우리 캠퍼스의 여학생들에게 '이 남자는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두는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여자든지 이 남자에게 꼬리를 흔든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용 데이트였다.
  하반기 세미나발표를 위해 분주하게 보내던 초가을이었다. 복학을 한 후, 근 3년이라는 캠퍼스의 공백을 메우기란 너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연일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날도 캠퍼스가 어둠에 찌들 때까지 후배인 정미의 도움을 받은 후, 홀가분하게 호프집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도서관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정미와 나는 조그만 접우산 속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몸을 밀착시키며 교정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뜻밖에도 비를 흠뻑 맞은 민지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난 그녀를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미에 대한 신세갚음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정미 역시 민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터라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빠른 걸음으로 빗속을 헤치고 가는 정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순간.
  "배신자. 뭐? 세미나 준비? 세미나의 주제가 여자 꾀는 방법인가보지? 바람둥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민지의 목소리가 빗줄기의 사이사이를 헤치며 내 귓바퀴에 박혀왔다. 세미나가 끝나기까지 당분간 만날 수 없다고 나는 이미 민지에게 통고해 둔 상태였다. 이미 그녀의 두뇌에 입력되어버린 오해의 데이터는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비에 젖은 민지를 그냥 보낼 수 없는 밤이었다. 젖은 옷도 옷이었지만, 민지는 몹시 떨고 있었다. 따스한 방이 필요하였다. 평소에 낯설게만 느껴왔던 여관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였다. 민지는 알몸이 되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추위 때문에 떨고 있었지만, 나는 목화처럼 하얀 그녀의 속살을 보며 떨고 있었다. 그렇게 그리던 그녀의 벗은 몸은 경이로운 조각품이었다. 지구상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 어떤 조각품도 내 몸이 떨릴 정도의 감동은 주지 못하였다. 민지는 나의 따스한 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침을 꼴깍거리면서 옷을 벗는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지…… 민지의 차가운 육체와 내 따스한 육체의 연결은 흡사 전기를 흘린 열선처럼 금방 빨갛게 달아올라 불덩이로 변해갔다.
  발가벗은 어느 포르노 여배우의 알몸을 보며 민지에 대한 욕망을 대리만족하던 나의 강렬한 욕구가 뜻하지 않게 이루어져버린 후. 내가 진짜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 민지를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민지는 내 품안에서 속삭였다.
  "자기야.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자기한테 줬잖아. 이젠 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돼."

  <목>요일. 여전히 민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핸드폰의 꼴이 점차 역겨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대하면 민지의 얼굴이 겹쳐져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야구 볼처럼 직구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아오르곤 하였다. 민지에 대한 분노는 아무런 죄도 없는 핸드폰으로 서서히 전이되고 있었다.
  내 핸드폰이 잠을 자고 있다는 현실은 견딜 수 없는 고독감으로 이어졌다. 절해의 고도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외로움이었다. 민지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연락을 뚝 끊어버린 그녀의 행위는 내내 나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나는 핸드폰이 울리는 환청현상까지도 맛보고 있었다. 급기야는 핸드폰의 호출음을 진동으로 하거나 꺼 달라는 교수님들의 당부를 무시하고, 호출음을 경쾌한 음으로 유지시켜 턱하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호출음이 교수님의 열띤 강의를 끊어 놓을 때마다 그 얼마나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곤 하였던가. 그 호출음 하나로 인하여 맥이 끊어져버렸던 교수님의 강의를 그 얼마나 안타까워하였던가.  게다가 핸드폰을 열어 속삭이며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녀석들을 보며 '저런 인간도 대학물을 먹고 있는 지성인이란 말인가?'라고 비난을 퍼붓곤 하였다.
  민지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그녀를 단념할 수 없다는 쪽의 저울추가 무겁게 작용되고 있었다. 그녀의 살맛을 느껴버린 나는 그녀의 모든 허물을 덮어줄 일종의 의무감이나 책임감도 있었지만, 방사의 쾌감을 알아버린 수컷의 소유 본능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들개들이 아닌 이상, 몸을 섞게 되면, 비록 법적인 혼인관계는 아니더라도 평생을 함께 살아갈 계약을 한 것이 아닐까? 최소한 나의 마음은 그런 일편단심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고 통고를 해 왔고, 떠난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사실…… 내 마음 같지 않은 그녀를 확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껍데기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 한편이 뻥 뚫린 듯 허전하였다.  
   대학 구내매점에서 친구 용민이를 만났다. 나의 답답한 가슴을 열어 보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용민이는 민지를 처음 만났던 날, 함께 술을 마시던 멤버였기에, 민지와 내 사이에 대해 늘 관심이 많았다. 남의 영업집 장미꽃으로 여자를 낚은 장미족이라고 나를 놀려댔다. 봉이 김선달같은 놈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무모한 도전으로 민지를 낚아챈 나를 꽤나 부러워하였다. 민지의 연락두절을 두고 녀석은 내 어머니와 같은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한심하군. 어쩌다 그렇게 푹 빠져버렸니? 그렇게 빠져서 고시준비라도 어디 제대로 되겠냐? 너에게 연락을 안 하는 것으로 봐서는 계도 신발 거꾸로 신을 가능성이 다분한 여자야.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지. 요즘 세상의 모두가 너처럼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착각은 말아라. 너도 처용이 같은 놈이 되지 않으려면……"
  내 마음속에서 민지를 향한 일말의 증오심이 번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녀석이 민지를 비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녀석이 어떤 의도로 처용이를 들먹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1학년 때 교양 국어시간에서 접했던 처용가에 대한 강의가 언뜻 떠올랐다.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춤을 추며 마음을 다스렸다는 처용이. 기말시험을 치를 때 '처용가에 대하여 논하라'는 문제가 나오자, 처용을 향해 아주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처용이는 어딘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바보 멍청이 얼간이 같은 인간이라고…….
  
<금>요일. 민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여전히 민지의 핸드폰은 잠들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체념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맑은 하늘에서 권태롭게 떠다니던 해가 서녘을 향해 달릴 무렵, 지방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는 고교 동창생인 석이가 찾아왔다. 녀석은 같은 대학의 여학생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돈도 절약되고 재미도 볼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지."
  녀석은 어깨를 쭉 펴고 의기양양하여 나에게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눈을 흘기며 주먹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날 이상하게 보지마라. 요즘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여자 쪽이 더 적극적이었어. 요즘 여자들 다 그래."
  녀석은 자신의 허물을 모두 여자들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너 같은 놈들이 있으니까 문제야. 여자애들 다 싸잡아서 말하지 마. 정숙한 여자들도 많으니깐."
  "아무튼 요즘 여자애들 대담해진 것은 분명해."
  고교시절부터 잦은 미팅을 하며 락카페에서 파고 살다시피 하던 녀석. 요즘 잘 나가고 있는 신도시인 분당부근에서 땅을 가꾸던 아버지의 땅 덕분에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이 철저하게 베인 녀석이었다. 녀석은 외제차를 한대 구입했다고 뻐기고 있었다. 압구정동에서 여자아이들을 만나기로 했다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꺼내 놓았다.
  "오늘 만나는 애들은 물 좋은 애들이야. 밤새껏 마시고 흔들 수 있어. 니 정도면 애들이 자지러질 거야. 어때?"
  녀석의 말을 듣는 내 입에서는 군침이 가득 고였다. 민지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곧 거절하고 말았다. 궁색하게 녀석의 두툼한 지갑에 짓눌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함께 간다면 정말 죽여주는 분위기가 될 텐데……. 그 대신 다음 주말에 동해안에 가지 않겠어? 요즘 정동진에 가고 싶다고 안달하는 애들이 많아. 네가 간다면 괜찮은 애로 낚아 놓을게."
  나는 대답대신 삐긋이 웃으며 어서 가라는 손짓만 해댔다. 사실 내 내면 속에서는 녀석을 따라가라는 명령어가 계속 떠돌고 있었다. 술과 음악과 현란한 조명과 춤, 그리고 여자들의 웃음……. 녀석을 따라 가 광란의 밤을 맛보며 민지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치솟아 올랐지만, 그 동안의 기다림을 헛되이 하고 싶지가 않았다.
   녀석을 돌려보낸 후, 동네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내 방으로 잠입하였다. 금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만나던 민지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더 이상 민지의 얼굴을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증오가 밤송이처럼 내 가슴에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면 민지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소식불통…… 그녀가 분명 나를 능욕하고 있다는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 일주일……. 다시는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다고 똥씹은 얼굴로 으르렁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그녀와의 재회를 앞두고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바보, 바보, 바보…….

   <토>요일. 드디어 민지가 돌아오는 날이었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민지를 만나면 어떻게 할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잘 다녀왔느냐고 웃어줄까? 아니면, 내 가슴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으며 민지를 비난하고 야유를 던져볼까? 내 마음은 갈래갈래 흐트러진 채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아침부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수도승처럼 좌장하고 민지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렸다.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알 수 없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에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집에서 발만 동동거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렇다면 사내인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 민지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버튼을 눌러댔다. 신호가 두번 정도 울리고 민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세요? 진호입니다. 잘 다녀오셨어요? 민지 좀 바꿔 주세요."
  "아 자넨가? 글쎄 그년이 지금까지 연락이 없네. 자네한테도 연락이 없었나?"
  "함께 가지 않으셨어요?"
  "무슨 말인가? 나는 계모임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어제 왔는걸."
  "예에…… 그러세요? 돌아오거든 저에게 연락을 주라고 전해 주세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나를 강타하고 있었다. 충격은 나를 깊은 나락 속으로 이끌었다. 암흑으로 뒤덮인 세계가 펼쳐졌다. 희미하게나마 나의 초라한 모습을 음미할 수 있었다. 허우적거릴 힘마저 소멸되어갈 즈음, 핸드폰이 마치 꿈속에서 울리는 듯이 울리고 있었다. 액정에는 0124040이라는 숫자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민지로부터의 음성호출이었다. 녹음을 확인하였다.
  "자기야. 나 이제 도착했어.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보고 싶어. <차가 있는 마을>에서 만나. 사랑해. 쪽쪽쪽쪽쪽……."
  민지의 목소리는 너무나 맑았다. 갑자기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차가 있는 마을“로 나갔다. 왜 자꾸만 내 자신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느껴졌을까.
  종업원이 따라준 물 컵을 쥐고 있는 손이 술중독자마냥 떨리고 있었다. 민지를 맞게 될 내 행동들을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민지가 내 앞에 나타나면 물 컵을 집어 던져버려? 아니면 재떨이를 집어 던져버려? 차라리 뺨을 한대 올려 쳐? 내 머릿속에서는 폭력이 난무하였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옷깃을 여미며 신중히 행동하자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하였다. 부글거리는 마음은 100도 이상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줄담배를 다섯 개비나 피웠을 때 쯤, 민지는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화사한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민지로부터 풋풋한 오이냄새가 풍기는 듯 하였다. 지금까지 혼자 지지고 볶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민지를 꼬옥 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나의 이중적인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민지가 내 곁으로 오더니 밀착하며 앉았다.
  "자기야. 미안해. 연락 못해서…… 많이 화났지?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 . . . . . "
  그녀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혀끝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은 그녀의 애교스런 몸짓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래? 인상 좀 펴고. 나 좀 봐봐."
  민지는 아무런 말이 없는 나를 향해 갖은 애교를 피워댔다. 그녀에게 미소를 던져야 한다는 생각이 내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었지만, 나를 그토록 애태웠던 그녀를 놀려주어야겠다는 보복심리가 발동하여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장승같은 나를 두고 시무룩해지더니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고 있었다.
  "친구한테 전화를 하고 올 때까지 화를 좀 풀어. 알았지?"
  민지는 내 눈치를 살피며 공중전화 쪽으로 향하였다. 나는 맑은 민지의 모습을 보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는 미소를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입을 열게 된다면 일주일씩이나 연락을 하지 않는 못된 버릇을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민지의 얼굴은 약간 굳어 있었다.
  "자기야. 엄마에게 다 들었구나. 정말 미안해.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취하고 싶지 않았어. 혼자서 맘껏 바람을 쏘였어. 이젠 아주 깨끗해. 지금부터는 자기만 죽도록 사랑할거야. 약속해."
  민지는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억지로 걸며 미소 지었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거렸다. 입을 열어 '도대체 너는 꼬리를 몇 개나 달았어?'라며 꼬옥 껴안고 싶었다.
  "정말 이럴 거야? 힘들어도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자기한테 사과하는 나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거야? 이젠 나 같은 여자 싫어졌어? 그래, 미안해. 나 집으로 갈 거야."
  민지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민지가 토라질 때마다 의례 취하는 행동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하지만 적반하장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부아가 치밀었다. 알량한 자존심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민지는 한 묶음의 쥐포더미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총총걸음으로 나가버렸다. 민지가 남기고 간 쥐포봉지 밑에 그녀의 다이어리가 짓눌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그녀의 다이어리를 열어보았다. 하루하루의 일정표에는 온통 깨알 같은 글씨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루하루의 짧은 일기였다. 지난 일주일의 공간에도 글씨가 가득하였다. 나는 그 내용들을 단숨에 읽었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꼬옥 물고서 읽었다.
  <일…… 희수의 스포츠카로 서울출발, 월…… 용인에버랜드, 화…… 경포대, 수…… 설악산, 목…… 속초, 금…… 정동진>
  분명히 커피숍의 천장에서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몸을 의자 등거리에 맡긴 채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0124040이라는 숫자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열었다. 민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젠 사랑이 식어버린 거야? 붙잡지도 않구…… 자기야 미안해. 이제부터는 전화도 잘 하고, 다시는 자기 속을 썩이지 않을 거야. 사랑해.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야.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만한 남자 없다고 생각했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사랑해."
  내 귀에는 아무내용도 남지 않았다. 갑자기 처용이가 생각났다. 처용이가 추던 춤은 어떤 춤이었을까?
                                                         『제주작가』 3호(199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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