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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홍의 소설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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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 머리의 여자가 좋다



            나는 긴 머리의 여자가 좋다

                                                        

  몹시 차가운 기운이 내 육체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비몽사몽 느꼈다. 몽롱한 뇌리 속에 내재된 나의 침실은 따스함과 짜릿함이 베인 공간으로 입력되어 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창문에 둘러쳐진 핑크빛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은 분명히 아침햇살이었다. 햇살의 줄기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진 방안을 쓱 훑어보았다. 방안의 푸른빛 도는 벽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갈색 테이블이 창문 바로 아래에 앙증맞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 왼쪽에 세워진 옷걸이에 나의 회색양복이 맹수의 가죽처럼 치렁치렁 걸려 있었다. 둥근 테이블, 그 오른쪽에 금색으로 된 유럽풍 화장대, 그리고 곁에 뉘어진 하얀 시트의 침대, 그 위에 내가 누워 있었다.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였다. 색에 굶주린 수컷과 암컷이 몸부림치며 쏟아놓은 분비물의 냄새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개로부터 고개를 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몸뚱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중년의 나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볼 품 없는 몸매……. 순간적으로 알량한 부끄러움이 반사 신경에 전달되었다. 알몸을 가리고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불은 침대 밑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이불을 끌어올리라는 명령어가 뇌리를 타고 있었지만, 하얀색의 이불에 닿은 시선은 그러한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얀색이 던지는 차가운 느낌을 피부가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망자를 뒤집어 씌웠던 하얀색 커버를 떠올린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하얀 색상에 대한 알레르기반응은 몸에 푸른 기운을 띄웠다.
  마치 타인의 육체를 관찰하듯이 객관화된 시선을 덤덤하게 던지고 있었다. 하얀 시트 위에 얹혀진 내 육체가 너무나 낯설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탄력과 윤기를 잃어버린 허연 살결…….
  아침마다 욕실의 거울 속에서 재생되는 나의 알몸은, 채소가게의 야채처럼 샤워기의 물기를 머금고 싱싱해진다. 그 싱싱함을 나는 믿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아침햇살 속에 공개된 내 몸뚱이는 나의 그 믿음들을 참담하게 짓밟고 있었다.
  8킬로그램짜리 아령을 양손에 들고 팔 근육을 단련하고, 시멘트를 부어 만든 역기를 들어올리며 가슴근육도 단련하였다.
  그래서 욕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킹콩이 되기도 하고, 타잔이 되기도 하였다. 여성의 젖가슴만큼은 아니더라도 적당하게 튀어나온 가슴을 툭툭! 팔을 오므렸다 펴며 알통을 툭툭! 타잔의 목소리까지도 흉내를 낸다. 너무 윗몸에만 신경 쓴 듯싶어지면, 제자리에 앉았다 일어서길 몇 번. 이런 나의 체력관리는 살을 빼는 목적이 아니었다. 한 10년 정도의 나이를 빼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그토록 처절하게 다듬어왔던 근육들은 이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슴의 근육과 팔의 근육, 그리고 뱃살이 조그만 요동을 쳐도 침대 위로 흘러내릴 듯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검은 음모에 쌓인 페니스마저도 땡볕 속의 강아지 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아아,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술상무가 된 후부터 몸 관리를 게을리 한 대가였다. 지금까지 쌓여왔던 알코올이 내 목을 타고 역류하는 듯 하여 욕지기를 느꼈다. 참담한 신음소리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올라 진한 가래로 변하였다. 언제나 술에 찌들어 휘청거리며 살던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유년기의 내 조그만 손에 때 타월을 감싸주며 등을 빡빡 밀어달라던 아버지의 명령은 중노동이었다는 표현이 솔직하리라. 아버지의 팔과 다리는 굵었다. 또한 등도 넓었다. 팽팽한 근육들은 내 눈앞에서 넓은 바위처럼 버티고 있었다. 뼈가 여물지 않았던 나로서는 아버지의 넓은 등에서 남자의 의미를 읽고 있었다.
  내가 성장한 후, 다시 목욕탕에서 아버지의 등을 밀었을 때, 아버지의 근육은 붙잡으면 붙잡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힘없이 쏠리며 흐느적거렸다. 인생의 무상함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늙어지면 쇠퇴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남자대 남자로 느끼는 연민 때문에 코끝이 아려왔었다.
  바로 그런 아버지의 쇠퇴의 길을 뒤따르고 있는 나를 감지하고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드는 내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내 알몸을 감상한 끝에 음흉하게 다가서는 상념들을 활활 태워버리고 싶어 성냥개비에 불을 댕겼다. 버섯구름과 같은 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담배는 유황냄새가 뒤섞인 불꽃을 삼켰다. 심호흡하듯 깊숙이 빨아 삼켰던 연기가 회색빛으로 햇살을 파고들었다.
  햇살을 타고 떠도는 연기는 환상이다. 연기의 판타지가 연출되면 내 영혼은 4차원의 세계를 넘나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실, 그리고 미래를 넘나든다. 뇌의 회전이 막히게 되면 햇볕이 잘 드는 공간을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공기가 정지된 공간……. 내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 꼿꼿이 선 담배……. 길게 꼬리를 물고 상승하는 연기 한 줄기……. 길다……. 그래 긴 머리……. 분명히 그녀는 긴 머리의 여자였다. 이 모텔까지 함께 온 여자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어제는 A그룹의 김이사와 함께 룸싸롱에 갔다. 대형회사인 A그룹은 일거리를 주는 회사이고, 쪼그만 우리 회사는 일거리를 받아야 빵을 해결할 수 있는 회사이다. A그룹의 실세인 김이사는 우리 회사의 생명 줄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술동무로 뛰어든 나는 우리 회사의 운명을 짊어지고 뛰어든 기쁨조의 역할인 셈이었다. 일개 과장에 불과한 내가 그런 어마어마한 접대행사에 등용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술을 마시더라도 남들처럼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는 물배, 마셔도 붉게 변하지 않는 얼굴색, 술자리를 즐겁게 만드는 애교와 입심, 취해도 비틀거리지 않는 뚝심, 취했다 하여 혀가 꼬이는 발음을 내지 않는……. 뭐 그런 조건들이 졸지에 사장의 눈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와 술을 마셔도 나 자신은 취하지 않고 상대방을 녹다운 시킬 수 있는 능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조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제는 우리 사장의 부친제사 때문에 김이사와 단 둘이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내 호주머니에 법인카드가 있었으니, 술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자주 드나드는 업소였던 만큼, 마담에게 손을 들어 사인만 보내면 여우처럼 질서 있게 움직여 주었다. 그 집에서 가장 보물처럼 여기는 에이급의 접대부들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의 에이급 기준은 어딘지 모르게 지성미가 풍기는 여자, 풋내가 술술 풍기는 젊은 여자, 늘씬하면서도 적당한 살을 가진 여자, 그리고 술을 잘 마시면서도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여자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김이사와 내가 룸을 차지하자 웨이터는 은쟁반에 물수건을 얹어들고 나타났다. 그 후 곧바로 룸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아가씨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예견한대로 흠을 잡기 힘든 여자들이었다. 물론 첫 눈에 거부감이 들면 교체를 해 주는 것이 그 업소의 룰이었다.
  두 명 중의 한 명은 분명히 김이사의 자리에 앉을 여자이며, 나머지 한 명은 내 곁에 앉을 여자였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예쁜 여자가 내 곁으로 와 준다면 좋을 테지만, 술상무인 나에게 그런 선택권은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선택되어지길 기다리며 몸을 비비꼬는 두 여자에게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습관대로 김이사를 향해 아가씨를 골라 앉히라는 무언의 표정을 보냈다. 한 아가씨는 단발머리에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팬티를 겨우 가릴만한 짧은 원피스에 드러난 하얀 살이 탐스러운 여자였다. 그리고 긴 머리가 양 볼을 살짝 가린 한 쪽 여자는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를 꽉 조인 드레스 속의 가슴이 금방이라도 툭 터질 것 같아 위태롭게 여겨지는 여자였다.
  그러나 무슨 조화란 말인가. 슬쩍 바라본 검은 드레스의 아가씨에게서 들판의 풀잎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헛기침을 내고 말았다. 숨을 잠깐 멈추며 김이사의 선택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을 읽어버린 것일까. 김이사는 단발머리에게 옆자리를 권하였다.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 한 컵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 긴 머리의 그녀가 곁에 앉은 이후, 술맛은 달콤하게 입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술과 노래와 진한 농지거리가 뒤섞인 여흥은 어두운 조명을 뚫고 익어갔다. 내 파트너가 된 그녀는 노래도 불러주고, 춤도 추어주고, 술도 먹여주고, 안주도 넣어주며 애교를 피웠다. 한낱 술집아가씨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지속적으로 풍기는 수수께끼 같은 향기가 계속 나의 교감신경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한번쯤은 마주친 듯한 모습……. 아무리 내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헤치고 한 톨, 한 톨, 세심하게 점검해 보아도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그녀에게 이전에는 어디에서 일을 하였느냐는 질문만을 퍼부어 댔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뿐이라고만 하였다. 그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목이 탄 나는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비워댔다.  
  김이사의 혀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술자리는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는 구실로 슬쩍 자리를 떠서 마담을 불렀다. 김상무와 아가씨를 묶어 모텔로 보내기 위한 타협을 보기 위해서였다.
  계산을 끝내고 되돌아서는 내 발길이 이상하리만큼 자꾸 허공을 가로질렀다. 취기 때문이 아니라 발길이 그곳을 떠나기 싫어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분명히 술상무로서의 임무는 끝난 상태였다. 뇌리에서는 자꾸만 긴 머리의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는 욕구가 집요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법인카드의 위력이었다. 까짓 내일 황천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내 손가락 사이에서는 벌써 두 번째 담배가 타오르고 있었다.
  생각을 더듬고, 또 더듬어도 모텔에 들어선 것까지만 기억이 날 뿐……. 내가 그녀와 어떤 과정을 거쳐 잠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 그 기억들은 백지로 남아 있었다. 혹시나 싶어 몸을 일으켰다. 수사관이 범인의 단서를 찾듯이 시트 위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시트 위에 널브러져 있어야 할 음모도 없었거니와 한 점이라도 떨어져 있어야 할 정액의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역시 나는 그녀와 정사를 하지 않았다. 술을 과하게 마시면 여자를 탐닉하지 않는 버릇이 어디로 가겠는가. 끄덕끄덕 고개 짓을 하며 다시 벌러덩 눕다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길게 늘어진 실뱀과 같은 머리카락을 발견한 것이다. 잽싸게 들어 올려 눈앞에 바짝 대고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 곁에 누워서 잠을 잤단 말인가.  
  짙은 갈색 빛을 띤 가늘고 긴 머리카락. 스트레이트파마를 한 탓인지 곧게 뻗은 머리카락은 적어도 40여 센티는 됨직하였다. 분명히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들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고무줄처럼 당겼다 놓는 놀이를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머리카락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미세한 파동은 첼로 또는 바이올린의 음으로 금방이라도 재생될 듯싶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나와 마주친 적이 있을 것 같은 여자……. 도대체 어디에서 보았을까? 술기운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에 또 다시 궁금증을 집어넣고 있었다.
  어디에서……. 기어코 그녀를 다시 만나 캐내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은 입술 사이에서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머리카락이 어느새 내 입 속에서 질근질근 씹히고 있었다. 내 의식이 머리카락으로 옮겨졌을 때에는 이미 내 이빨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동강내고 있었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끄럽기 짝이 없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젠장 헐…….
  나는 왜? 긴 머리에 이처럼 집착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오며 여자에 대한 미련을 많이 제어하며 살아왔지만, 긴 머리 여자만 대하게 되면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지나간 여인들을 상기시켜 보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도 젊은 시절엔 현대풍의 파마머리를 하고 다니는 멋쟁이였다. 참, 나를 끔찍하게 아껴주던 할머니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쪽을 지을 때마다 동백기름을 바르던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 할머니의 긴 머리는 내 감정 속에 똬리를 틀고 있은 풋풋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긴 머리를 찰랑거리던 외국 여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사진을 책갈피 속에 넣고서 흠모하던 고교시절. 꿈속에 나타난 그녀 때문에 몽정까지 해버렸던 사건은 내내 황당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랬기 때문일까. 단지 그 여배우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갑자기 기억의 샘 속에서 떠오르는 옛 기억들로 인해 내 양 볼에서는 가벼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TV를 켰다. 정신을 차리고 모텔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TV에서 동요가 흘러 나왔다. 어린이용 프로그램이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유년기에 많이 부르던 ‘나뭇잎 배’라는 노래였다. 흥미가 없어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나의 손은 다시 동요 쪽의 방송을 선택하고 있었다. 나뭇잎 배를 함께 부르며 들길을 달리던 친구들의 모습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올랐다.
  햇살에 물들어 은빛물결을 이루던 억새풀 사잇길을 뛰어다니던 순녀의 긴 머리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유난히도 긴 머리를 가졌던 그녀. 그녀의 머리카락이 기억의 회로를 이어 놓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에 두 개의 반이 있었다. 1반은 남학생들의 반, 2반은 여학생들의 반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유별해야 한다는 유교적 인습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고학년의 여학생과 남학생이 가깝게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이 주변에서 생난리를 떨어댔다. 6학년쯤이 되면, 남자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은 공적인 말을 제외한 사적인 말은 서로 피하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자못 둘의 모습이 다른 아이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가기 때문이었다.
  여자반의 반장인 순녀를 나는 꽤 좋아하였다. 그녀는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그녀의 머리는 조금 과장하여 하루에도 12번은 더 변하였다. 머리띠를 둘러 긴 머리를 휘두르는가 하면, 두 갈래로 단정하게 따 내리기도 하고, 한 묶음으로 꼬아 댕기를 달기도 하였다. 그녀의 키는 나보다 10여 센티는 더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했던 그녀는 중.고등학교에나 다니는 아이로 비춰지곤 하였다. 같은 또래 여자아이들의 밋밋한 가슴에 비해 그녀의 가슴은 옷 밖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나 가슴앓이만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학교 주변에서 주류도매점과 구멍가게를 겸하고 있었다. 그랬던 탓에 인근 마을에서 큰일이 치러질 때마다 술은 우리 집에서 배달되었다. 유리가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소주는 투박한 사기 독에 담겨져 말술로 생산되었다. 막걸리 또한 큰 나무통에 담겨져 판매되었다. 소량의 술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직접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술을 받아갔다.  
  학교의 반 친구들은 자기네 마을의 구멍가게에서 술을 소매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으로 술을 구입하러 왔다. 그 이유는 내가 쥐어주는 십리사탕이란 하얀 알사탕 때문이었다. 그 십리사탕은 십리를 걸어갈 때쯤에야 다 녹을 정도로 단단한 사탕이었다. 나누어 먹기 위해서는 망치나 돌이 필요할 정도로 단단했다. 이익이 나지 않는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탕 한 개로 손님을 끌어들이는 상술은 있었던 듯싶다.  
  순녀도 가끔은 제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서 한 개의 사탕도 받아먹지 못하였다. 그녀가 나타나면 나는 숨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곁눈질로 안타깝게 그녀를 지켜보면서도 정작 그녀와 사적으로 마주치게 되면 술래잡기를 하듯이 꼭꼭 숨어버렸다. 참, 바보 같았다.
  우리 집은 자전거를 다섯 대씩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리 잘 산다고 하더라도 자전거를 보유하기란 힘든 때였다. 방학이 되어 그녀를 못 보게 되면, 안장이 높아 힘에 부치는 자전거를 끌고 20리 길이나 되는 윗동네까지 다녀오곤 하였다. 그녀의 집 앞을 지나치며 따르릉하고 벨소리를 울려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듣던지 말든지 오로지 그녀를 향한 무언의 메시지를 보낼 뿐이었다. 그녀의 찰랑거리는 긴 머릿결만 보아도 돌아오는 길은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이웃집 여자아이 길자가 내 창문을 두들긴 시간은 아홉 시를 넘긴 야심한 밤이었다. 담임인 정선생님이 숙직을 서는 날이기 때문에 숙직실로 놀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우리 학교는 매일같이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며 숙직을 섰다. 특히 여자 선생님인 정선생님은 무서움을 많이 타는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숙직당번이 되면, 학생들과 함께 숙직을 섰다.  
  담임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우쭐함과 당당한 외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적으로 여자아이들은 외박이 안 되는 것이 시골 풍토였다. 그러나 여자 선생님과 함께 숙직을 한다면 언제나 흔쾌히 아이들의 외박을 인정해 주었다. 그 때문에 계란꾸러미를 들고 정선생님과 함께 숙직을 서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였다.  
  어머니는 자식을 챙겨주는 선생님이 고마웠던지 가게 안에 즐비한 과자들을 주섬주섬 챙겨 주었다. 어머니가 한 주먹 넣으면, 나는 덥석 한 주먹을 더 챙겨 넣었다. 그날따라 달이 없는 날이었기에 어둠은 짙게 깔려 있었다.
  과자봉지를 들고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선 나의 온 몸을 어둠의 공포가 짓눌러댔다. 숙직실 쪽의 들창에서만 유일하게 불빛이 가물가물 새어나오고 있었다.  
  무서운 옛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에 밤에는 얼씬도 않던 운동장이었다. 우리 학교는 운동회를 할 때나, 소풍을 갈 때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용이 될 이무기를 잡아버린 후, 그 원한이 지금까지 서려있기 때문이라는 등, 6,25때 대량 학살이 자행된 후, 귀신들이 우글거리기 때문이라는 등,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난무한 학교였다.
  두 눈을 찔끔 감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숙직실 문고리를 잡는 그 순간까지도 목덜미에서는 귀신의 손길이 닿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미처 기침소리라든가 노크를 할 틈도 없이 문을 열었다. 순간, 방안의 등잔불이 꺼짐과 동시에 고막을 찢는 여자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의 신원을 확인시켜주었을 때야 비로소 호롱불에 불이 붙었다. 선생님의 모습은 아니 보이고, 네 명의 여학생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나는 여자아이들이 우글거리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특히, 순녀가 시야에 들어오면서부터 나의 몸은 더욱 더 굳어지고 있었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구석으로만 파고들었다.    
  역시 수다쟁이 길자는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잘도 깨트려 주었다. 정선생님은 급한 일이 생겨서 숙직을 설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하였다. 그렇다면 선생님도 없는 숙직실에 어찌하여 나를 불러들였단 말인가. 난처한 일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만한 여자 애들 속에 내가 그대로 섞여 있어야 한단 말인가.  
  여자아이들은 어른이 없는 숙직실이 꽤나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흑기사가 필요하였고, 학교근처에 살고 있는 내가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대장 격인 순녀가 내렸다는 말을 접하는 순간, 내 얼굴에서는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겁쟁이였던 나는 그네들을 지켜주는 흑기사로 돌변하여 어깨를 쭉 폈다. 그리고 헛기침까지 했다. 찐 고구마를 먹고 있던 그네들 앞에 과자봉지를 풀어 헤쳤다. 그네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가격도 비싸고 고급스런 과자들이었다. 당연히 그네들의 입이 벌어질 만도 하였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밤새워 파티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과자가 줄어들 때쯤에, 나는 그네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라는 의식이 소멸된 그저 천진스러운 아이들의 대화였다.  
  소꿉놀이를 하던 저학년 시절 이후, 처음으로 여자아이들과의 자연스런 자리를 만들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주로 동네의 풍문들이 화제로 떠올랐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이어졌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에 속하였다. 여자아이들의 수다스러움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듯한 호기심으로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네들의 입에서 처음 접하는 정보들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누구와 누구는 결혼할 사이라는 등, 누구와 누구는 밤마다 만나 상엿집으로 들어간다는 등, 어느 동네 누구는 임신을 하여 쫓겨났다는 등, 누구와 누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입에서 멈출 줄을 몰랐다.  
  급기야는 어른들 세계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면서, 임신이 어떻다는 등, 아기를 갖지 않으려면 콘돔을 써야 한다는 등의 낯 뜨거운 이야기들까지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았다.
  제 부모가 쓰던 콘돔을 풍선처럼 불어 학교에 가지고 왔던 개구쟁이 동이의 이야기도 양념으로 등장하였다. 교감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녀석이 벌을 서던 그날의 이야기 때문에 모두 배꼽을 잡고 나뒹굴었다.
  나는 그때서야 녀석이 가지고 온 거대한 풍선이 어른들의 섹스에 쓰이는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처럼 큰 풍선은 미국에서나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 당시에 좀 희귀하고, 고급스러웠던 물건들은 대부분 미국제들이었으니까.  
  같은 또래인데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알고 있는 만큼의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구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그네들의 말에 덩달아 웃어댔을 뿐이다. 지금이야 성교육을 학교에서 시킨다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성에 대한 지식을 하나하나 터득해 나갔던 셈이다.
   그 날, 나는 성에 대한 많은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아기가 배꼽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성기를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도 알았고, 섹스를 하고 쑥과 씀바귀를 생식하면 임신이 안 된다는 사실도 듣게 되었다. 그런 정보를 흘린 아이는 한 술 더 떠서 1년 선배인 여자아이가 동네 청년인 누구와 섹스를 했는데, 쑥과 씀바귀를 먹고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까지 들이댔다. 훗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정보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이다.
  어린 것들은 어른들의 입에서 오르내려야 할 이야기들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러한 현상도 농촌의 주거 환경 탓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겨울이 되면, 뗄 깜을 아끼기 위해 한 방에서 우글거리고 지내는 사이에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섹스이야기를 하는 그네들의 볼은 분명히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를 가장 곤욕스럽게 만든 것은 사타구니에서 불끈 솟구치는 고추였다. 고추가 치솟는 순간, 나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두 손으로 가리기에 바빴다. 흉을 잡히게 될까보아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엔 밖으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밤하늘의 별빛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빛나고 있었다. 밤이 길어서 순녀와 함께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벽시계의 추가 새벽 1시를 알리고 있었다. 그네들은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도 그네들과 하룻밤을 지새워야 할 처지였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서서 방을 정리하는 그네들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역시 여자들이라서 그런지, 그네들의 손놀림에서 내 잠자리를 보아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그네들의 나이가 나보다 한참 위인 것처럼 느껴졌다.  
  벽장에서 내려지는 이불은 두 개, 요는 하나뿐이었다. 베개도 두 개 뿐이었다. 여자아이들의 눈빛이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윗목 쪽에 요를 깔고 두 개의 베개를 나란히 얹었다. 그리고 이불을 폈다. 솜이 두툼하게 든 색동 이불이었다. 순녀를 뺀 아이들 세 명은 맨바닥에서 이불만 뒤집어쓰고 책보자기를 베개 삼아 누웠다. 요 위에서 자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순녀와 내가 한 이불 속에 들어가는 시나리오였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향해 베개 쪽으로 손짓을 한 것은 길자였다. 순간 나의 시선은 순녀에게 머물렀다. 그녀도 무언의 몸짓으로 나를 요 위로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결정된 상황이었다. 두 눈을 꼭 감으며 재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이들의 알 수 없는 키득거림이 내 귓전을 울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와 한 이불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볼을 꼬집어보았다. 마치 이불 속의 어두움이 마법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마법의 성 속에서 왕자와 공주가 사랑을 속삭이는 환상을 보았다. 이불 속에서 숨을 쉬기가 답답하여 얼굴을 밖으로 빼는 순간, 누군가에 의해 호롱불이 꺼지고 있었다. 그리고 순녀가 이불 속으로 풍덩 들어왔다. 내 몸은 그녀의 미동까지도 섬세하게 느끼고 있었다.
  순녀가 내 곁에 누웠다! 순녀가 내곁에 누웠다! 밤하늘에 대고 크게 외치고 싶었다. 나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의 심장은 환희의 큰 북소리를 울려댔다.    
   방안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도란거리던 애들의 소리는 쌔근거리는 잠소리로 변하였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만 방안을 맴돌 뿐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애썼지만, 두 눈은 어둠 속에서 초롱초롱 빛났다. 나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스럽게도 크게 울리는 듯 하였다.
  순녀도 역시 내 곁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침 삼키는 소리 역시 크게 들려왔다. 차라리 뭔가 말을 하면 좋으련만, 서로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녀는 뒤척였다. 그녀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긴 머리카락은 나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머릿결이 내 볼을 스치고 있었다. 너무나 간지러웠다. 아무리 그녀의 머리카락을 피하려 애썼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집요하게 나의 입술 근처를 맴돌았다. 알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내 실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흘렀다. 내 가슴속의 박동소리가 커지는 원인이었다.  
   어둠에 익숙해 졌을 때, 그녀도 나처럼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좀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 듯이 내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그녀 쪽으로 이동한 내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따스한 감촉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저 손등에서나마 느껴지는 그 감각만이라도 좋았다. 그녀는 전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잠들어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마법의 성 속에서 공주처럼 서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손등을 돌려 나의 손을 쥐었다. 자칫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부드러운 감촉이 내 뼛속을 타고 흘렀다.
  나의 공주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오 나의 공주여!
  순서대로라면, 만화 속의 주인공처럼 그녀의 손에 입맞춤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의 사타구니는 또 다시 무거워지고 있었다. 참, 별난 일이었다. 나는 힘을 주의 그녀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녀의 머리가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또 다시 나의 볼과 입술을 간지럼 태웠다. 하품을 하느라 연 입안으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한입 베어 물었다.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는 머리카락이었지만, 왠지 달콤한 사탕 맛이 날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물고서 몽롱한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밤새 마법의 성에서 그녀와 손을 잡고 푸른 초원을 뛰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눈을 뜬것은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밥 짓는 소리 때문이었다. 낯선 방에서 맞는 아침은 상쾌하였다. 문밖에서 들리는 도란거림으로 보아 두 명의 아이가 부지런하게도 아침을 짓고 있었다. 아침의 밝은 기운이 들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벽시계는 6시를 알렸다.
  순녀가 허리를 구부린 채 내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내 팔은 그녀의 어깨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내 가슴속으로 전달되었다. 간밤에 그렇게 뛰던 내 가슴은 평온하기만 하였다. 그저 그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였다.
  부엌 쪽에서 솥뚜껑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순녀는 허리를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를 휘두르고 있던 내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얹혀졌다. 그녀의 튀어나온 가슴이 물컥 느껴졌다. 나는 질겁하며 손을 떼고 말았다. 나의 호들갑스런 몸동작이 순녀를 깨우고 말았다. 순녀가 눈을 떴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향하는 내 몸은 허공에 떠 있는 듯 하였다. 동쪽 산기슭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향해 크지도 적지도 않게 “야호”를 외쳤다. 그날따라 햇빛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녀의 따스한 손의 감촉을 기억하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의 감촉도 입술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네들이나 나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생활을 하였다. 어쩌면 그날 밤은 그저 마법의 성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였다. 하룻밤의 추억 때문에 친해질 줄 알았던 그네들은 새침데기로 되돌아 가 있었다. 오히려 더욱 더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나 또한 순녀의 곁을 지나게 되면 얼굴이 더욱 빨갛게 변하여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주변의 눈을 의식한 탓이었다.  
  며칠 후, 순녀는 슬그머니 쪽지 한 개를 쥐어 주었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서 조심스럽게 쪽지를 폈다.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면 어떻게 해? 바보처럼…….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그 날 밤을 말하면 너하고는 절교야. 알았지?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야.’
  이불 속에서 손을 잡고 함께 잤다는 사실…….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래, 영원히 비밀로 하는 거야! 몇 번이고 다짐하였다. 글 속의 바보라는 단어는 왠지 기분이 언짢았다.

   지금쯤 그녀도 중년의 여인네가 되어 애들 줄렁줄렁 달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내 볼과 입술에 순녀의 머리카락이 남긴 간지러움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긴 머리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 상상 속을 부유하였다. 샤워를 마친 후, 냉장고 속에 든 생수를 꺼내 마시며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 하얀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야. 나 편하게 자다가 가요. 무슨 남자가 바보처럼 머리 냄새만 맡다가 자요? 혹시 고자??? 호호호. 영 억울하면 다음에 한 번 더 봐요. 내가 두 배로 앙갚음 할 테니까. 먼저 가요.’
  나는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바보……. 순녀가 쓴 바보라는 단어와 룸싸롱 아가씨가 쓴 바보라는 글자가 겹쳐져서 내 뇌리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상사화 꽃 다 지고』 (문학과 의식刊,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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