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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호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가을에 피는 배꽃

가을에 피는 배꽃


유 금 호





10월이 되면서 잘 익은 사과며, 배 들이 시장 바닥과 골목 가게 앞을 차지하면 나는 불현듯 가을 날 핀 배꽃을 떠올린다.

봄에 피어나야 될 꽃이 엉뚱하게 서리 내리는 가을철에 배꽃이 피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을 시골 과수원에서 자라면서 보았던 늦가을 피었던 배꽃에 대한 기억들이 내게는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무렵은 여름 태풍이 더 잦았을까. 한창 자라던 열매는 물론, 잎사귀와 줄기마저 비바람이 할퀴고 가 버리면, 배 밭에는 내년 봄 필 꽃눈이 계절을 잊고 늦은 가을, 몇 송이씩 처연하게 피어났던 것이다.

"열매도 맺지 못할 꽃인데....”


후년 농사까지 망쳐버린 아버지는 그 가을 배꽃 앞에서 담배파이프에 불을 붙이시곤 했다.


그 배 밭 주인도 오래전 바뀌었고, 가을 배꽃 앞에서 내 손을 쥐던 아버지도 이승에 계시지 않지만 10월이 되고, 목덜미에 스며드는 바람이 서늘해지면 나는 가을 배꽃과 아버지 생각을 한다.






가을에 피는 배꽃은 열매가 달리지만 다가오는 추위 앞에 금방 까맣게 시들고 만다.

열매가 맺혀도 자라지 못하고 시들면서도 여름 태풍이 휩쓸고 간 가을날 배 밭에는 그렇게 가끔 배꽃이 피었던 것이다.


우리 들 삶과 역사의 행간에도 결과에 이르지 못한 도전과 좌절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는가.

60여년 살아온 생애의 가을 철 길목에서 문득 젊은 날의 무모했던 계획과 도전들의 좌절과 허무에 대한 회오가 올 때도 있다.

닥쳐올 추위에 시들어 떨어지겠지만 현재의 잎 떨어진 가지에 새잎과 꽃을 피우려는 노력의 그 의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해서 현재의 도전이 존재하는 것.




가을, 나는 고려시대의 노비 ‘萬積’의 생애를 다룬 장편소설 ‘만적’1,2권을 출간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몇 줄 기록되어 있는 노비들의 실패한 반역을 소설로 다루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高麗史節要 14券 神宗靖孝大王 元年에 기록된


<...萬積, 味助伊, 延福, 成福, 小三, 孝三 等 六人, 樵于北山, 招集公私奴隷, 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 寧有種乎, 時來則亦可爲也, 吾輩安能勞筋苦骨, 困於 楚之下, 諸奴皆然之 乃剪黃紙數千, 皆鈒丁字爲識, 約以甲寅, 聚興國寺....."..... 以告忠憲, 逐捕萬積等百與人, 投之江.....>

이 몇 줄로 외로운 사내, 만적(萬積)을 만나면서, 고뇌와 분노, 그의 침묵의 행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가을에 핀 배꽃을 여러 번 떠올렸다.

실패가 예견된 미래에 대한 도전에는 가을 배꽃 같은 처연함과 비장미가 있다.


어차피 800여년 전, 1896년 초여름의 그 날, 바윗돌에 묶여 예성강 강바닥에 수장당한 만적의 생애를, 그 1170년대에서 1190년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러한 시도로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

신종(神宗)원년,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시절, 만적의 저항은 100여명의 수장(水葬)으로 끝난 몇 줄 패배의 기록일 수도 있다.

세밀한 계획 없는 무모한 분노와 열정이 만든 그 좌절에 대한 연민 역시 아니었다.

그러나 영혼에 자리했던 원초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 세월과 상관없이 순치되지 않는 생명력에 대한 관심으로 더운 여름날들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만적’에 대한 소설을 써가는 동안 나는 어린시절 과수원에서 보았던 그 가을 배꽃의 서늘하던 냉기가 품어대던 이상한 비장미를 여러 번 떠올렸다.


억압은 침묵과 복종으로 위장되지만, 그 자유에 대한 꿈은 지하수나 용암 같아서 깊은 곳으로 흐르고 흐르다가 한 순간 지표로 솟아오를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긴 여름 나를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

응어리진 분노와 열정만으로 시도 되었던 그 노비반란은 실패를 예견하고 있었다.

실패가 예견된 도전의 비장함. 그것은 가을 배꽃처럼 처연하기에 더욱 비장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




어차피 우리들 인생에서 모든 계획과 노력의 결과는 불확실하고 미래는 언제나 안개같이 부옇다.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우리 들 삶에 있어서 젊은 날의 무모해 보는 정열과 용기는 더 순수한 것이 아닌가.

좌절과 실패의 결말이라 해도 어차피 인생은 정지되어 있을 수 없는 지향성을 갖는 것.

그 도전이 순수하기만 하다면 결말에 비극적 색채가 깃들여도 여전히 그것은 가을 배꽃같이 아름답다.

인간의 삶에서, 역사의 기록에서 규정해놓은 모든 결론 역시 반드시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가치관이 바뀌면 기존의 결론은 다시 정의되고 수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려 가는 때, 열매로 키우지도 못할 꽃을 피워내는 여름 태풍을 겪은 배나무들 생각을 이 10월에 나는 다시 하고 있다.

한때 순수한 열정으로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타 산화해버린 한 시대의 젊은 영혼들에 대한 아픈 기억의 조각 들 역시 나는 늦가을 피어나는 배꽃에서 다시 떠 올린다.






교수님! 가을에 피는 배꽃에서 아버님을 떠올리셨군요... 저도 이번 휴일에는 조상님들께 늦은 성묘를 하고 돌아 왔습니다. 늘 조상님들을 지키시던 아버지는 그 조상님들 곁으로 가셨고... 모든 것들이 제 차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흔적만 커보일 뿐이더군요... 교수님! 조석으로 날씨의 변덕이 심합니다. 건강 조심하십시오.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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